병원에서의 크리스마스 날.

Diary 2009. 12. 29. 00:54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특별한 감흥은 없지만, 라디오를 켜기만 하면 들리는 크리스마스 캐롤 덕분인지 나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물씬 느끼면서 출근을 하는데.

출근을 할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중요한 물건을 챙기지 못하고 출발한 듯한 꺼림칙한 느낌도 들고, Blue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생각 덕분인지 우울한 느낌도 들고, 또 크리스마스 이브를 부질없이 마무리 지은 탓인지 불길한 느낌까지도 들었다.
사실은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리 슬플 것 같지도 그리 당혹스러울 것 같지도 않았었다. 기쁜 일들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면야 사소한 일조차도 슬프게 느껴질 수 있을테고, 계획된 일과 그에 대한 기다림이 있었어야 갑작스럽게 생기는 일이 당혹스럽게 느껴질 수 있을테지만... 나야 뭐-

크리스마스 연휴를 병원에서 보내게 된, 내 파트 환자들.
몇 분 있지도 않은 환자들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알게 되었고. 그 중 한 환자에게 생긴 문제는 결코 만만하게 볼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행히도) 병원을 벗어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괜찮은 핑계거리 하나 생겼군.'

사실 크리스마스를 병원에서 우울하게 보낸다는 사실은 전혀 슬프지 않았다.. 사실은 내가 '아픈' 상처를 '아프게' 소독 해준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제일 나쁜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녀석이 의식을 잃고 경련과 고열에 하루 종일 시달렸고, 약을 주어도 소용이 없고 여기저기 알아봐도 명확한 원인이나 마땅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다는 무능력함이 참 슬펐다. 초조한 마음으로 의국을 지키다가, 쇼파에서 깜박 잠이 들고. 다시 눈을 뜨고 혹시 열이 좀 떨어졌나 확인해보고 다시 쓰러지듯 잠들고. '대체 난 뭘하고 있는건지..'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어야지, 그저 걱정해주며 안심시켜주는 의사 따위는 결코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정말 바보같다.. 오늘이 크리스마스라서 우울하고, 안좋은 일들이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자꾸 일어나는게 속상하고, 내가 너무나 바보 같아서 슬프다..
나를 어디까지 비꼬고 조롱해야 속이 시원한지. 내가 어디까지 나 스스로를 비하하고 원망해야 속이 시원한지.

크리스마스날 연인과 오붓하게 사랑이야기 나누며 보내야지 혼자 노는게 뭐가 좋으냐고 놀린다면 할 말이 없다.
아이가 이렇게 열이 펄펄 나는데, 어서 열을 떨어뜨려주지 못하고 뭐하냐고 물어본다면 할 말이 없다.
그저 고개 푹- 숙이고 입술만 꼭꼭 씹을 뿐.


세상이 마음대로 되는 일들로만 가득차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두 손 잡고 꼭 붙어서 길을 걷는 연인을 보면 운전하다가도 한눈이 팔리고,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애인을 향한 사랑 메세지만 들어도 가슴이 콩닥거리는데- 누군들 연애 하고 싶지 않아서 연애를 안하냐고.
두 눈 꼭 감고 누워서 땀을 뻘뻘- 신음소리를 끙끙- 내면서 앓고 있을 환자를 생각하면 하루 종일 걱정을 좀처럼 떨쳐버릴 수가 없고, 내 무능력함에 스스로를 수백번도 더 원망해, 신까지도 미워지는데- 누군들 환자를 아끼고 사랑하지 않아서 그러냐고.

정말 위로가 필요한 날이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위로를 받을 수 없었고. 심지어는 마음만 곱씹고 되뇌이며, 그저 조용히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It's blue- blue- blue-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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