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이 왕- 만큼 나다.

Thought 2006. 12. 10. 01:59

국시 끝날 때까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컴퓨터 이용을 금하겠노라고 다짐했었는데.
바로 오늘이 그 특별한 경우 중 하나. 집에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웃기는 의사-간호사 커플'을 만나는 바람에 기분이 완전 나빠져버렸는데, 어디 토로할 데도 없고 해서, 결국 홈페이지에다가 이렇게..

 

 

얼마 전부터 학교까지 왕복하는 2시간 남짓의 시간을 아무 것도 안하고 멍하니 보내는게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버스 안쪽 창가에 쭈그리고 앉아서 문제를 끄적끄적 풀면서 다니고 있는데... 오늘도 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고 30페이지를 목표로 공부를 막 하고 있던 참이었다. 

 

한 커플이 버스에 탔는데. 아마도 정차한 정류장 근방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 간호사 커플로 여겨지고,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3-4년차쯤 되는 내과 의사와 같은 병원에서 일하게 된지 얼마 되지 않은 간호사인 것 같다. 이쁘장하고 늘씬한데다가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에 애교로 넘쳐나고 다 좋지만... 말하는 내용을 듣자하니 안타깝게도 무개념인 티가 너무나 팍팍 나는게- (아마도) 남자가 여자의 외모와 애교에 홀딱 빠져서 결혼까지 하게 된 모양이다.
주말 저녁, 사람이 꾸역꾸역 탄 버스 안에서 막대 사탕을 쪽-쪽- 소리 나도록 아주 맛있게 빨아먹으면서 남들 들으라는 듯이 '자기야' '여보야' '사랑한다고 말해줘' '귀엽다고 해줘' 이외에도 온갖 수작들을 동원하며 애교부리고 아주 난리가 났다. (그래, 신혼이라니 나도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해 주려고 노력했다.) 남자는 아직 홀딱 빠진 기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전혀 통제를 못하고 가볍게 응답해주며 그냥 듣고만 있었다. 결국에 가서는 그 남자도 '여자들은 도대체 이해가 안가.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할 수도 있는 건데, 왜 꼭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무릎 꿇고 꽃다발을 안겨주길 바라지?' 라고 까지 말하는데, 여자는 무슨 소리인건지 못알아 들었는지 아니면 남자도 내심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지 정신 차릴 줄을 모른다.
애교부리는 것 이외의 그나마 대화라고 할만한 대화들에는 '우린 의사-간호사 커플이다' 라는 티가 팍팍 날만한 말들만 골라서 하는데. 그래, 그 정도면 누가 들어도 의사 간호사인 줄 알아보겠다, 그리고 누가 들어도 남들 의식하고 하는 상투적인 대화라는 것도 알겠다. 이어지지 않는 대화를 억지로 그렇게 티내며 이어가는데, 주의를 안뺏기고 공부에 집중하려고 해도 결코 쉽지가 않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억지로 문제를 얼렁뚱땅 풀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 여자가 언뜻 내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더니 갑자기 국시 얘기를 시작한다.
'자기도 국시 볼 때 공부 열심히 했어? 난 공부 하나도 안했는데.' / '의대는 국시 성적 들어가는 경우도 많아.' / '정말? 나는 원래 공부 안하고들 시험 보는 줄 알았는데. 너는 아마 공부 안했어도 성적 잘나왔을꺼야~ 근데 의사 고시는 시험보면 다 붙는거 아니야? 난 내 주위에서 떨어지는 사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 '아니야, 나 아는 선배 중에도 떨어진 사람 있었어.' / '헉, 시험에 떨어졌다고? 미친거 아니야?' / '원래 10프로 붙는 시험은 떨어져도 안쪽팔려도 10프로 떨어지는 시험은 떨어지면 완전 쪽팔리거든. 그래서 은근히 타더라.' / '정말 그런가보네~'
갓 일하게 된 사람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애초에 자기 직업에 대한 진지한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지, 직업 의식은 눈꼽만치도 없나보다. 그리고는 '자기는 거만한 편이지만 남들에 비해선 그렇게 거만하지 않은거'라며 변명아닌 변명을 하면서 잘난 척도 좀 하고, 남편을 치켜 세워주면서 주위 동료와 선후배도 좀 까대주고.. 세상이 얼마나 좁은 줄 아는지 모르는지. 그리고 그런 안좋은 소리를 주위 사람이 듣고선 '의사 간호사들은 다들 생각들이 저렇구나' 라고 오해하지나 않을까 염려도 안되는지.
그들은 내리기 3-4 정거장 전에 40대 초반 정도 밖에 안되어 보이는 어느 젊은 아주머니께 뜬금없이 갑작스레 자리를 양보하더니, 내릴 때즈음 되어서는 품위있게 '와인' 이야기를 하고는 내렸다.

 

결국 그렇게 내가 내리기 바로 직전 정류장까지 나는 그들과 원치 않는 동행을 하고 말았다. 그들과의 동행 40여분, 공부 계획이 물거품되어버린 것도 모자라 저렴하고 우스운 대화를 이렇게 전부 들어버린데 대해- 내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짜증이 막 나려고 하던 찬라..

대체 내가 왜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들의 대화를 듣고선 짜증스럽다고 느꼈는지. 왜 부끄럽고 망신스럽다고 생각했는지.
혹시 내 삶 한 편에 존재했던 수많은 생각의 조각들 중에 저들과 같은 생각의 조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삼인행 필유아사언' 이라더니... 당신들도 혹시라도 이글 보게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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