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

Thought 2008. 5. 30. 16:22

아끼던 반지가 있었다.
그 반지는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반년여 오랜 시간 동안 끼고 다녔었던 반지였으며,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던 반지이다. 그 반지를 끼고 다닐 때면 항상 사람들은 '혹시 커플링이 아닌지' 하고 물어보곤 했다. (이 때문에 한 때는 혹시 누군가 내게 다가오려던 사람이 그 반지를 보고선 뒷걸음칠지도 모른다는 우스운 생각도 하기도 했다.) 그 반지는 내가 재수하면서 수능시험 준비를 하던 때 엄마, 누나, 동생 셋이서 사주었던 순금반지다. 순금반지라 값어치는 꽤 나가지만 - 그래서 엄마는 가끔 농담반 진담반으로 '대학들어간 뒤 혹시 술마시고나서 지갑에 돈이 없을 때 팔아서 술값을 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순금이라 그런지, 약해서 쉽게 휘어지고 또 쉽게 흠집이 생기는 볼품없어 보이는 샛노란 반지였다.

내게 있어서 그 반지는 자제력을 유지해주는 일종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다. 어쨌건 그 반지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가길 바라는 염원의 의미를 가지는 수능 백일 반지였기 때문에, 친구와 게임방에 들러 게임을 할 때나 혹은 충동적으로 공부에 방해가 될만한 일거리를 만들려고 할 때면 항상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되어주었다. '차마 빼버리진 못하겠으니 참아야지. 꾹 참아야지.' 사람이 손을 쓰지 않고 무슨 일을 한다는 건 감히 상상할 수가 없으니, 이렇게 손이라는 건 언제나 사용하는 만큼 눈에 자주 띄고.. 그러다 보니 손의 가장 잘보이는 자리에 끼어지는 그 반지라는 것의 역할은 그만큼 크다고 하겠다. 일종의 인내라거나 혹은 다짐이랄까.

더운 날에 그 반지를 끼고 다닐때면, 반지와 손가락 사이에 땀이 차서 약간의 불쾌한 느낌에 버릇처럼 반지를 손가락에서 뱅글뱅글 돌렸고. 땀으로 축축하게 불은 반지 뒤쪽의 속살을 말리겠다고 반지를 약간 느슨히 빼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추운 날에 그 반지를 끼고 다니면 항상 내 손가락보다 먼저 차가워져서, 반지의 차가운 기운을 없애보고자 버릇처럼 반지를 낀 손가락을 왼손으로 꽉 움켜쥐어 추위를 식히기도 했다. 처음 낄 때의 약간 찝찝한 느낌, 그리고 얼마 간 끼고 있노라면 마치 하나가 된 양 느껴지는..

어느 날 아침에 급히 서둘러 학교를 가는 바람에 잠시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그것을, 그 날 저녁이 되서야 잃어버렸다는 걸 알았다. 두꺼운 잠바를 입었을 적이니 대학교 1학년 겨울 쯤이었을까. 그 반지를 잃어버리고 난 뒤, 한참동안 결코 잃어버린게 아니라고, 그 반지가 지금 어딘가 내 주변에 있고 다만 내가 그 반지가 어디있는지 찾지 못할 뿐이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그 반지를 잃어버리기 전이었던 대학교 1학년 중반 즈음, 철없이 그리고 자제력 없이 이런 저런 일들을 벌이고 다녔을 때 - 그랬던 내 자신이 무척 죄스러웠는지 그 즈음 반지를 한동안 쭉 빼놓고 다녔었던 - 그 때 부터 '이미 내가 마음 속에서 반지를 잃어버린게 아닐까' 하고 의심을 품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가지고 나간 반지를 실제로 잃어버리게 되었고, 점차로 자제력 없는 행동이 늘어만 가더니 그게 극도에 달해서 '아 드디어 내가 반지를 잃어버렸군' 하며 실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 서랍 속엔 그 반지는 어디론가 없어져버렸고, 대신에 그 반지를 담아두었던 빈 상자만 놓여있다. 그 껍데기를 볼 때면 드는 생각은, 그 반지를 운좋게 습득하게 되었을 사람이 내 소중했던 그 반지를 탐욕의 대상으로 (반지를 줍고 나서 얼마의 돈을 벌었다는 희열 따위 밖에 줄 수 없는 그런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오래도록 끼고 다니던 동안에 내 손에 꼭 맞게 끔 맞추어진 반지였는데. 반지가 빠지지 않을 만큼 나를 반지에 적응시켜버릴걸.. 아니, 그보다 그 반지 뒤켠에 날카로운 걸로 내 이니셜 혹은 내 이름을 새긴다거나...

하긴 그 반지를 애초에 잃어버렸길 잘했지. 혹시라도 아직까지 계속 그 반지를 간직해왔다면 내 자제력 없는 행동에 대한 죄의식에 그 반지를 내 책상 서랍 속 더욱 깊숙한 곳으로 몰아만 갔을 것이다. 더군다가 거기에 내이름 세글자가 깊숙히 패여있는 걸 볼 양이면, 그 죄의식이 더욱 깊어졌을런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반지의 소중함 - 내가 수능 시험을 볼 적에 가족들이 내게 주었던 사랑과 소망을 의미하는 - 에 혹시라도 반지를 담았던 빈 상자를 열어보았을 때, 그 안에 반지가 덜컥 들어있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 가끔 그 케이스를 열어보곤 한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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